한의학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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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적만족과 지식의 최전선
개원하고 원장님들과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몇 달 동안은 손님으로 생각했었는데 좀 더 지나니까 사람 만나는 것이 힘들어지더군요. 하루 종일 진료를 감시하는 것 같아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습니다. 혹독한 트레이닝을 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찾아오는 이들의 질문은 한결같았습니다. 왜 그 자리에 침을 놓느냐, 왜 그 처방을 선택했느냐, 왜 그 약을 넣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침과 처방의 작용기전을 해부생리학을 바탕으로 설명하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질문을 종합해보면 결국 해부생리학적인 지식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마다 학생캠프에서처럼 구구절절이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더군요. 그런데 정작 질문하는 사람은 해부생리학을 다시 보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한의학순환구조론은 현대의 해부생리학적인 지식들을 한의학으로 번역하여 보여줍니다. 약선당을 찾아오는 원장님들과 학생들은 이런 번역이 낯설었던 것이지요. 찾아오는 이들과 한의원에서 해부생리학을 같이 공부했고, 내친김에 한의학의 기초를 볼 수 있는 ‘잡병제강’을 해부생리학으로 번역해주는 작업도 해보았습니다. 이런 공부 방식에 대한 전체적인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전통 한의학의 입장에서 보면 기본 중에 기본인 잡병제강을 해부생리학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특별한 치료기술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의학순환구조론은 철저하게 과거 한의학의 이론과 경험을 인정하고, 현대의 해부생리학으로 그 경험과 이론을 재해석함으로써 침구치료와 한약의 작용을 알아내고자 하는 이론입니다. 즉 과거 한의학의 치료기술이 없다면 한의학순환구조론의 이론전개는 불가능합니다. 한의학순환구조론으로 해석하는 서적들은 모두 한의학의 근간을 이루는 책들이며, 기본원리를 이해하여 응용하기 위함입니다.
한의학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은 특별한 비방과 비법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약선당은 기본기에 충실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본기를 바탕으로 꾸준히 영역을 넓히는 한의원, 작은 결과를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약선당이고 싶었습니다.
한의학순환구조론을 쓴 후 10년을 되돌아보면 제가 이해한 지식체계는 제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식의 세계에서는 나만의 지적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길임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만약 한의학순환구조론이 이 방면에서 또 하나의 지식의 최전선이라면 제가 갈 길은 오로지 한 길입니다. 조용히 그 길을 밟아가는 것이지요. 이 길을 알아챈 이들과 함께......
‘송곳은 언젠가 염낭을 뚫는다.’(격언)
‘눈밭을 걸을 때는 함부로 걷지 마라.’(서산대사)
13.나의 한의학 여행기 13-無常
약선당을 개원하면서 수요일 오후진료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기 위해서였고, 순환구조론을 알고 싶어 찾아오는 이들과 자유롭게 만나고 싶었습니다. 또한 강의를 하더라도 수요일 오후를 쉬면 조금은 편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요즘은 겨울이라 찾아오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방학(?)을 했습니다. 덕분에 덮어 두었던 해부생리학 책을 다시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겼고, 이글을 쓸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2008년은 장부총론과 장부조분을 한의학당 모임에서 같이 공부하며 ‘한의학 개론’을 가다듬었습니다. 식물생리학과 관련된 서적을 통해서는 본초의 총론 역시 대부분을 풀어볼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해부생리학을 다시 읽으며 좀 더 넓은 해부생리학적인 시각을 만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읽은 ‘나도 이별이 서툴다’(폴린 첸)라는 책이 가장 기억에 남고, 올핸지 작년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위대한 요기 밀라레파’(정신세계사)가 아직도 긴 여운으로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불행하게도 한의학과 관련된 서적은 거의 읽은 기억이 없습니다.
이제 한의학에서 말하고자 했던 의학과 관련된 내용을 혼자 이해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숨 돌리고 보니까 한의학적인 치료기술에 대해 심각하게 되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고 과거의학의 치료기술 역시 시간을 건너온 것이라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겠지요.
溫故知新 :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없다.
無常 :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변한다는 사실만 변하지 않는다.
긴 글을 마칠 시간입니다.
20여년을 가볍게 되돌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혹 저와 생각이 달라 마음이 불편했다면 평범한 임상가의 긴 넋두리라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한 묵묵히 읽어준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천안 약선당 대표원장 이학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