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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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감초한의원 그리고 한약분쟁 1
1990년도 여름은 친구 덕분에 약 2개월간 대진을 하며 한의원을 운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대진은 별다른 사고 없이 무난하게 마쳤고, 이후 할일도 없고 시간이 좀 남아서 숙식을 제공하는 절에 들어가 한 달을 지냈습니다. 내심으로는 개원하기 위해 신재용선생의 신증방약합편을 보면서 처방을 익히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6일 고향인 충남서산에서 감초한의원을 개원했습니다. 한의원이름은 현재 우석대에 강의를 나가시는 김영철교수님의 한의원에 대진을 한 경험이 있어서 교수님 한의원 이름이었던 감초당한의원으로 결정했습니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개원했지만, 요즘처럼 비만이나 성형 등 특정한 질환을 목표로 하는 네트워크나 프랜차이즈 한의원이 없었던 때라 경험이 부족한 상태에서 개원했기 때문에 진료목표를 확실하게 선택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 때는 한의원의 숫자가 적어서 특화된 진료를 표방하지 않아도 희소성 때문에 대부분 그렇게 개원해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개원하고 임대건물에 문제가 있어서 1년 만에 한의원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개원 첫 해를 정리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침은 이렇게 놓으나 저렇게 놓으나 결과적으로 큰 치료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고, 어떤 질병을 내 의도대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더군요. 5개월간 취직했을 때의 느낌, 2개월간의 대진했을 때의 느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르다면 직접 내가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느끼는 중압감이 있었다는 정도였습니다.
처방은 더욱 한심한 경지였습니다. 한약을 복용하고 좋아졌다는 환자를 거의 보지 못했고, 좋아졌다고 해도 왜 좋아졌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 했던 동의보감 통계작업에서 얻었던 경험과 한 치의 차이도 없는 현실을 1년 동안에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뾰쪽한 방법도 그때는 없었습니다. 한의원을 옮기고 나서부터는 옛날 사람들이 했던 그대로 처방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정말 가끔씩 좋아지는 환자들이 생기더군요. 여전히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내는데 10년이 걸리더군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 고향에서 같이 개원했던 선배님들과 조금씩 공부하면서 처방을 이해할 수 있는 싹이 트고 있었습니다. 막내 한의사였던 제가 대부분 읽고 준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추위가 일으키는 다양한 증상을 다루는 방법을 기록한 상한론이라는 책을 보았는데, 그 책의 뒷부분에 있는 일본상한가들의 경험을 모아놓은 임상응용편을 주로 읽었습니다. 1년간의 짧은 임상경험이었지만 그래도 상한론의 처방은 좋은 결과를 자주 보여주었습니다.
상한론의 처방을 사용한지 20여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 처방들은 정직하게 일정한 효과를 보여줍니다. 약선당에서는 이들 처방을 복용이 편리한 과립(가루보다 굵은 입자)형태의 한약으로 감기 소화불량 생리통 등의 가벼운 질환에 단기간 투여하고, 퇴행성관절염과 같은 만성염증에 장기간 투여하고 있습니다. 과립제의 효과는 탕약과 비슷하거나 약간 낮은 수준이며, 복용과 휴대가 편리하고 비용이 저렴한 것이 장점입니다. 단점은 제약회사에서 완성된 처방형태로 공급하기 때문에 처방과 일치하는 증상만을 다룰 수 있고, 다양한 증상을 한꺼번에 다룰 수 없으며 과립제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비용대비 효과는 만족할 만큼 우수합니다. 그 힘들었던 시간 속에서도 상한론은 한줄기 빛이 되어 주었습니다.
개원 초기의 진료성적은 초라했고, 그날이 그날이었던 지루한 반복이 이어지는 타성에서 저를 깨워준 것은 ‘한약분쟁’이었습니다.
5. 한약분쟁 2
면허번호 5094번, 분쟁당시 모든 한의사가 모여도 아마 4천명을 조금 넘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당시 의사는 약 2만 명, 약사는 약 4만 명 정도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수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불리한 분쟁이었습니다.
시골에서 개원한 한의사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과천정부청사 앞에서 농성하는데 참여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경제적, 정치적인 노력의 한계가 너무도 확연한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 중 유일한 방법이 농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분쟁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대응방법을 찾는 것은 시골 한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농성장에 나오라면 버스를 대절하여 무작정 상경하여 참여했습니다. 당연히 한의사의 권리인줄 알았던 한약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를 빼앗긴다는 긴박감만 있었고, 그 사실이 너무도 분통 터지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분쟁의 명분에서 우리는 떳떳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가까이 지내던 원장님 중 한분이 분쟁의 원인이었던 약사법 시행규칙에 대한 이해가 깊으셨고, 덕분에 어렴풋이 분쟁의 원인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주위의 여러 원장님들이 이 사실을 같이 이해했고, 시골 한의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 약사법의 모순을 정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개월 정도의 긴 작업 끝에 약사법의 모순을 지적하는 두툼한 책을 만들었고, 이를 한의학과 관련된 단체와 법조계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 보냈습니다.
분쟁은 한의사의 법적인 지위에 대한 한계를 뚜렷이 보여주었습니다. 심정적으로 생각했던 한의학의 불명확한 테두리가 확연하게 드러났습니다. 현대의 일반적인 지식체계와는 상관없이 법적으로 인정되는 진료영역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한의사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문제를 발견한 것이지요. 한의학이 디디고 있는 모든 영역이 아직은 미개척지인 것 같았습니다.
한의학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고등학교 때까지 보고들은 수많은 정보들은 법적으로 필요가 없었고, 그 지식들을 사용하면 법적으로는 법에 어긋났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법적으로 정의된 대로 한의원을 하려면 조선시대 허준이 했던 방법 그대로 재현해야 합니다. 현재 나날이 발전하는 의학을 보고 듣고 그 치료경험을 가지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잊고 과거로 돌아간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마침내 한의학이라고 생각하며 디디고 서있던 학문적인 발판이 흔들렸습니다. 임상경험이 미천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고, 실제 한의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한의학의 지위에 대한 사실들은 졸업하고 개원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한의학은 사립대학에서 가르치는 사교육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며 자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부산대에 한의학전문대학원이 생기며 제도권교육이 실현되었고, 법적인 문제로 한약분쟁이 일어난 이후 근 20년만인 지난해 한의학을 정의하는 의료법에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들어갔습니다. 이제야 법적으로 한의사는 현대인의 사고로 한의학을 사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쟁을 겪고 나서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제 소임이 아니라 생각해서, 임상진료와 관련하여 학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로 눈을 돌렸습니다. 임상문제라면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절실함이 생겼습니다. 또한 한의사라는 직업에 만족하는 삶을 찾고 싶었습니다. 고향인 서산에서는 임상가들을 찾아다니거나 강의를 들으러 다니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한계가 있었습니다. 공부하기 위하여 한의원을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렇게 1994년 천안에 둥지를 틀었고, 약선당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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