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선당 한약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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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당과 나의 한의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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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선당과 나의 한의학 여행기 천안 약선당 대표원장 이학노   1. 한의대를 선택하다. 먼저 이글을 쓰게 된 이유를 설명해야할 것 같습니다. 한의학순환구조론이라는 책을 출간하고 나서 10여 년 동안 강의와 알음알이로 찾아온 많은 한의사와 한의대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해서 한의대를 가게 되었고, 순환구조론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책을 출판하게 된 동기 등을 가장 궁금해 하며 물어 보더군요. 저와 학문적으로 만나는 분들과 약선당의 진료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간략하게나마 이 부분에 대해서 글로 남겨 놓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시작합니다.   한의대를 선택하게 된 동기로는 중3(1978년)때 황달(A형간염?)을 심하게 앓았던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1년을 휴학해야할 정도로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고, 그 덕분에 건강과 체력에 문제가 있어서 다른 직업을 선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고2(1980년)때 한의대입학을 결정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동기는 시간을 많이 가져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습니다. 이것도 한약방에 다녀본 경험에서 얻은 기억에 근거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은 입시에 지쳐서 그렇게 생각한 것 같고, 다른 한편으론 여유 있는 삶에 대한 동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까지 시골생활에 익숙했던 터라 도시에서의 고등학교생활이 나름대로 힘들었던 것이 여유 있는 삶에 대한 동경으로 연결된 듯싶습니다. 지금의 약선당은 그런 동경이 만들어낸 꿈인 것 같습니다.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6년을 뒷바라지하는 것을 부모님들이 심각하게 고민하셨고, 그 당시 한의학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던 분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의대를 선택하는데 의학적인 기술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고, 당시의 한약방을 생각하면 경제적인 문제 역시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되돌아보면 참 아슬아슬한 선택의 길이었지만 한 점의 후회도 없습니다. 시간의 여유와 건강의 문제 모두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대단한 행운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냈고, 그 길을 급하지 않게 걸어가는 행운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모여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질병을 바라보고 연구하는 삶으로 연결되었고, 지금의 약선당을 이끄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2. 한의대6년 1982년 원광대학교한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원광대학을 선택한 것은 지금의 대학입시제도와 비슷했던 당시의 학력고사점수에 맞춘 결과였습니다. 당시의 한의과대학은 주목받지 못했었습니다. 덕분에 치열한 경쟁 없이 원서접수하고 합격하는 과정을 밟는 것이 대학입시의 전부였습니다.   대학에서의 생활은 고등학교의 연장선상 그 자체였습니다. 하루 여섯 내지 일곱 시간으로 짜여 진 수업시간은 고등학교 수업과 다르다고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시험보고 결과가 나쁘지 않으면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고 해야겠지요.   물론 시험성적으로만 보면 정말 평범하게 학교에 잘 다니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처럼 공부하면 졸업하고 대학가는 식으로 대학에서의 시험성적이 미래를 좌우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답안지에 써냈던 그 많은 답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한의학은 더 이상의 상상력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은 뒤로 미루어지기만 했습니다. 학교에서의 한의학이야기는 흥미를 잃었고, 신비주의를 이해하는 새로운 학문을 찾고자 노력했지요. 당시 양자역학의 흥미로운 세계를 대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신과학서적들과 천문학서적들 그리고 우주과학서적들에서 신비주의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국 이들 과학서적에서 익힌 과학의 방법론들이 한의학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역할을 하게 되었고, 한의학순환구조론을 쓰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관심은 선불교의 선문답이었습니다. 한의학의 이해할 수 없는 용어들과 별로 다르게 보이지 않는 선문답들을 읽고 생각하는 것이 한의학 교과서를 보는 것보다는 한결 편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차피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면서 혼자 머리 굴려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선문답을 구성하는 파격적인 언어들이 보여주고자 했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아마 넉넉하지 못했던 생활을 견뎌내기 위한 자구책이었던 듯싶습니다. 말하자면 현실도피였던 셈이지요. 지금 독립기념관 옆에 위치한 약선당에는 지난 세월의 고독했던 생각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론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한의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통계조사라는 방법에 도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본과 1학년인지 2학년인지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질환별로 사용된 처방과 본초의 사용 빈도수를 동의보감에서 조사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지요. 두통에도 이진탕, 복통에도 이진탕, 해수에도 이진탕 하는 식으로 처방과 본초를 어떤 기준에 근거해서 사용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이후 한의학공부는 친구들과 공부모임에서 방약지침이라는 유명한 처방집을 읽은 것과 국가고시 준비한 것이 전부였을 만큼 소홀히 했었습니다.   한의학의 바이블(성경)이라는 내경의 소문과 영추는 읽어보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상한론과 사상의학은 한 번도 처음부터 끝까지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국의학서적의 장부변증론치와 일본한의학의 질병명과 연결된 처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먼 나라의 말들로 여겨졌었습니다. 격세지감이 들지만 지난 10여 년간의 노력으로 그 어렵던 책들의 일부를 책으로 엮어내고 강의를 통해 한의학의 이론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6년의 세월은 흘러 무난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고, 2개월간의 합숙을 통해 국가고시에 합격했습니다. 저에게 있어 한의학의 요순시대는 의학적인 의혹이 풀리지 않은 채 그렇게 저물었고,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3. 한의사의 첫걸음 1988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영 소집되어 다음해 10월에 군복무를 마쳤습니다. 복무 중 무릎의 십자인대파열로 병원에서 수술하였고, 비슷한 시기에 모친이 대퇴골두무혈성괴사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무릎인대파열로 부종이 심하여 지방의 병원들을 여러 곳 다녀보았지만 해결되지 않아 결국 종합병원신세를 지게 되었습니다.   한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부종을 줄이기 위해서 열심히 무릎에 뜸을 뜨는 일 뿐이었습니다. 무릎부종은 한 달 만에 완전히 해결했지만 걸음은 여전히 절뚝거렸습니다. 종합병원 정형외과의사는 매우 간단한 검사하나로 십자인대손상을 의심하였고, 방사선사진촬영 역시 십자인대손상을 확인하는 자세로 촬영하더군요. 그리고 수술이 결정되었습니다. 수술시간은 완전파열이면 5시간정도로 잡았는데 다행히 30%정도 남아있어서 관절경수술로 마무리하였습니다.   모친의 질병 역시 한의사의 손을 벗어난 질환이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의학적인 치료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수술하기 위해 병원에 들어 가시기전에 체력보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정도였습니다. 당시 기술로 인공관절은 수명이 10년 정도였습니다. 수술 후 통증을 줄이고, 뼈를 보강하기 위해 한약으로 만든 환약(보골공진단)을 만들어 복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인공관절과 주위 뼈들은 양호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수술을 두 번 더해야했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엑스레이 촬영을 하면 양호한 상태라고 진단합니다. 한의학을 공부한 보람 중 하나이지만, 두 사건은 불가항력에 대한 무력감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두 사건은 메이저의학과 마이너의학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고, 메이저병원의 의학적인 권력을 살을 뚫고 뼈를 깎으며 배우는 계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한의학의 한계를 너무도 처절하게 바라보았던 셈이지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아마 이들 사건의 추억은 열등감 분노 무력감 등으로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경험은 현대의학과 견주어 한의학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게 해주었고, 현대의학의 장점과 단점을 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수고 덕분에 수천 년의 경험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질병을 치료하는 것은 기술과 더불어 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밑거름이 되어 약선당의 진료스타일이 만들어졌습니다.   1989년 10월경 취직을 위하여 서울의 제기동이라는 한의학 인력시장을 기웃거렸습니다. 실력도 없었지만 너무 어려 보여서 취직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세상은 참 묘한 곳입니다. 실력보다 나이를 먼저 보는 곳도 있구나 싶었습니다. 많이 서운했었습니다. 결국 서울에서의 취직은 포기하고 인천에서 자리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취직했지만 5개월 만에 그만 두었습니다. 풋내기 한의사의 역할이 영 시원치 않아서인지 여럿이 모여 산다는 것이 힘들었고, 고용되어있는 입장이 여간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기보다는 쉬는 것이 났다고 판단하여 무작정 그만두고 그 한해 부친의 농사일이나 거들려고 생각했습니다.   냉혹한 현실은 더 깊은 성찰과 수련을 요구했습니다. 의학적인 소양과는 상관없이 머리가 하얗게 바랜 지금은 우습게도 나이에 걸 맞는 권위가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의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던 시대에 의사의 실력은 경험에 비례한다고 생각한 것에서 비롯된 관습이라 짐작됩니다. 말하자면 용한 의원을 찾아 발품을 팔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던 셈이지요. 의료인이 많아지면서 인터넷은 이런 상황을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기광고를 하지 않으면 유명하다고 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약선당은 한의학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의학을 이해할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한의학과 진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